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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 홍성사

꽃게장세트 2013. 9. 26. 07:38

'순전한 기독교?' 제목만 들어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 제목이다. 서른이 넘어 기독교에 발을 조금씩 들여놓고 있는 내게는 당연히 쉽지 않은 주제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C.S 루이스(나니아 연대기 작가)가 지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나름 재밌게 봤기 때문이다. 책들은 항상 그렇듯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재밌는 부분도 있고, 지루한 부분도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운 부분을 굳이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에 지루했던것 같다. 순전한 기독교는 제목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나처럼 발을 들여놓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한마디로, '초신자'에게 권하고 싶다. 초신자라도 황당하거나 당화하지 않을 내용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서(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나의 생각이라는 것은, 유일 신이라는 전제와 이 세상에 무교-천주교-기독교만 있다는 전제다. 나는 기독교지만, 천주교가 무교와-신과의 통로(소통) 역할을 더 잘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기독교보다 여러가지(? 술, 담배, 제사, 성..)에 대해서 관대하기 때문에 무교인들(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덜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맘속에서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순전한 기독교를 읽어보게 됐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기독교도 거부감이 덜하게(없앨 순 없을거 같다) 무교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잘 알려면 우선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요즘 성경을 아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성경엔 손도 대지 않고 있다가 아주 조금씩 손대고 있다. 신앙서적은 신앙서적 나름의 역할이 있고 성경은 성경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냥 호기심에 조금씩 읽을 뿐이다. 내가 성경에 호기심이라도 생기도록 해주었다는 것에 '순전한 기독교'에 의미를 두고 싶다.


나와 같은 초신자라면 [순전한 기독교]를 권하고 싶다.







p. 19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제자들', 즉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p. 19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에 합당치 않게 사는 사람이 있을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하기보다는 '그는 나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분명한 표현합니다.


p. 21 여러분은 현관 마루에서 기다릴 생각을 해야지, 아예 천막을 치고 야영할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p. 21 '이곳의 예배 스타일을 내가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p. 21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방을 찾게 되었다면, 다른 방을 택한 사람들과 여전히 현관 마루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십시오.


p. 69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p. 71 우리는 암이 사람을 죽이므로 악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의사도 암을 죽이므로 악하다고 해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관점에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p. 97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며 새로이 출발하게 해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p. 102 회개한다는 것은 수천 년간 익혀 온 자기 민족과 자기 의지를 버리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 두렵다.


p. 102 회계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현법일 뿐입니다.


p. 112 그리스도인들이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에서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거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단지 머릿속으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그를 본받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들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 음.. 잘 모르겠다.


p. 115 극작가가 무대 위로 걸어나오면 연극은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세상을 침공하실 것입니다.


p. 116 하나님은 바로 이 기회를 주려고 잠시 지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체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기회를 잡든지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p. 132 여러분 중에 혹시 그리스도인이 될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곧 두뇌를 비롯한 자신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임을 미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일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정직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어느새 지성이 예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따로 특별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바로 교육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니언처럼 교육받지 못한 신자가 온 세상을 놀라게 만든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절제'는 불행히도 그 의미가 변질된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 이 말은 대게 '절대 금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요. 그러나 이 두 번째 덕목에 '절제'라는 이름을 붙였던 그 당시에는 전혀 이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절제는 특별히 음주와 관련된 말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쾌락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삼간다는 뜻이 아니라 적절한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부 절대 금주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절대 금주를 요구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회교입니다.


p. 133 그런 일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순간, 혹은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순간, 그는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p. 145 저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을 입술이 까맣게 타도록 되뇌일 수 있지만,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우지 않는 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p. 145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빨리 집에 가는 길입니다.


p. 150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p. 153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하지요. 어느 정도 악한 인간은 자기가 그리 좋은 사람은 못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악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깨어 있을 때는 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막상 자고 있는 동안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제대로 계산하고 있을 때에는 실수를 해도 금방 알아채지만, 틀리게 계산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실수를 알아채지 못하지요. 취하지 않았을 때는 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취해 있는 동안에는 모릅니다. 선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알지만, 악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모릅니다.


p. 156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남을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지요.


p. 157 순결은 기독교 덕목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덕목입니다. 여기에는 피해 갈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기독교 규범은 '결혼해서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충실하든지, 아니면 독신으로 완전히 금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지키기 어렵고 우리의 본능에도 어긋나는 규범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틀렸든지 우리의 성적 본느에 그야말로 문제가생겼든지 둘 중에하나가 분명합니다.


p. 160 성에 대해 쉬쉬했기 때문에 성이 골칫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성이 이런 골칫거리가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인류가 쉬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p. 161 기독교의 옛 스승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성적 쾌락은 지금보다 작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졌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정신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기독교가 성이나 육체나 쾌락을 본직적으로 악하게 여기는 양 말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으 틀렸습니다.


p. 161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결혼을 찬양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랑의 시는 거의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쓴 것들입니다. 누군가 성을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즉시 그를 반박할 것입니다.


p. 163 여러분이 지금 유혹바독 있는 성적 행위가 전부 건강하고 정상적이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기독교와 상관 없이 상식적인 눈으로 보아도 이것은 헛소리가 분명합니다. 모든 욕망을 무작정 따르다 보면 결국은 무력해지고 병들며 질투하고 거짓말하고 감추게 되는 등,건강해지고 기분 좋아지며 솔직해지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행복해지려면 상당히 많은 자제가 필요한 법입니다. 따라서 강하게 발동되는 욕구들은 전부 건강하고 온당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p. 164 진정한 갈등은 기독교냐 '본성'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제어하는 일에서 기독교적 원칙을 따르느냐 다른 원칙을 따르느냐에 있습니다.


p. 167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하지 않은 것을 최고의 악으로 여긴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육체의 죄는 악하지만, 다른 죄에 비하여가장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쾌락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쾌락입니다.


p. 169 남자와 여자라는 두 반쪽은 단지 성적인 차원에서만 짝으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결합되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혼외정사가 그토록 흉해 보이는 것은 원래 함께 어울려 모든 차원에서 연합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것에서 딱 하나(성정인 연합)만 떼어낸 탓입니다. 기독교적 자세란 '성적 쾌락은 먹는 쾌락 이상으로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 자세란 '음식을 삼켜 소화시키는 대신 씹기만 하고 뱉어 내서 미각적 쾌락만 얻으려 하면 안되는 것처럼, 성적 쾌락 역시 그것만 뗴어내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p. 169 기독교는 한 번 결혼이 평생을 간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교파마다 차이는 있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이혼을 전혀 인정하지 않지만, 어떤 교파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 마지못해 인정하기도 합니다.


p. 172 '사랑을 느껴야만'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경우, 결혼을 계약이나 약속으로 볼 여지는 아주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이 전부라면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고, 약속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약속이라는 것을 아예 하지 말아야겠지요.


p. 177 어떤 경우든지 끝까지 해내기만 하면, 처음에 느꼈던 흥분은 사라지는 대신 좀더 차분하고 지속적인 재미가 생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처음의 흥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정적이지 않은 재미에 마음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아주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흥분을 발견하게 되기 쉽습니다. 비행을 배워서 좋은 비행사가 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음악의 매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아름다운 곳에 가서 정착한 사람은 정원 가꾸기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어떤 것이 먼저 죽지 않는 한 참으로 살아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담긴 뜻의 작은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p. 185 용서는 좀더 쉬운 대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지난주에 내게 잘못한 행동이나 말을 용서하느 ㄴ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당장은 이런 것만 용서해 주기에도 바쁠 것입니다.


p. 186 그들이 늘 말했듯이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p. 190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서는 안 됩니다.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됩니다.


p. 216 그리스도인의 방식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태어날 때부터 느끼는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를 채월 줄 것 또한 있는 것이 당연해. 아이는 배고픔을 느끼지. 그러니까 음식이란 것이 있잖아. 새끼 오리는 헤엄치고 싶어하지. 그러니까 물이란 것이 있는 거고. 또 사람은 성욕을 느껴. 그러니까 성관계란 것이 있잖아.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아닌 다른 세상에서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얘길 거야. 지상의 쾌락으로 그 욕구를 채울 수 없다고 해서 우주 전체를 가짜로 볼 수는 없어. 아마 지상의 쾌락은 처음부터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생긴 게 아니라, 다만 이 욕구를 일꺠워 주고 진짜 쾌락이 어떤 건지 암시해 주려고 생긴 걸 거야.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이 지상의 축복들을 반갑잖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쾌락들이 복사판이나 메아리나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지. 진짜 고향을 그리워하는 욕구는 죽은 후에야ㅐ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니만큼, 이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잘 지켜야겠다. 이 욕구가 다른 욕구에 짓눌리거나 밀려나지 않게 하자. 나 자신이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일을 내 삶의 주된 목표로 삼자.


p. 217 상징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비둘기처럼 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을 낳아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p. 219  증거가 충분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믿으려고 애쓰는 이가 있다면 그저 어리석은 사람으로 간주하면 그만입니다.


p. 221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은, 잘 추론해 본 결과 기독교를 믿을 증거의 무게가 충분치 않은데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은 그렇게 생기지 않습니다.


p. 222 우리는 믿음의 습관을 들이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p. 222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p. 223 사실상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 100명 중 정직한 논쟁을 거쳐 추론한 결과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저 어쩌다가 믿음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p. 230 그것이 사실임을 경험으로 체득하는 것


p. 230 '나는 그 순간에 도달했을까?'라는 질문은 던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털썩 주저앉아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 지점에 얼마나 가까이 왔나 확인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대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납닏. "와! 지금 내 키가 크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중에 뒤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이게 바로 키가 자란다는 거로구나'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p. 256 하나님을 배우기에 정말 적합한 도구는 다함께 하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입니다.


p. 261 작가가 소설 속 가상의 시간에 쫓기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주의 시간 흐름에 쫓기지 않으십니다.


p. 268 상상하는 순간, 이미 그림은 그려져 있었습니다.


p. 289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던 젊은이가 사실은 자신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교회에 그만 다니기로 할 경우 - 부모를 속썩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정직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할 경우 - 그리스도의 영은 그 전 어느 때보다 그에게 더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p. 341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꼐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