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엔도 슈사쿠/ 홍성사
[책과 만나는 토요일 오후]의 5월 선정도서다. 출산으로 5월 모임은 취소 됐고, 6월 모임에서 우리는 '침묵'과 만날 예정이다.
내가 최근 성경을 읽고 있다는 얘길 들은 통로님이, 김은국의 순교자와 비슷하다며 이 책을 추천해주었다. 재미로는 순교자보다 나은것 같다. 지루한 내용이 없고 박진감 있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좋은 논제로 좋은 얘기 많이 나누는 모임이 됐으면 하는 바랍니다.
p. 39 가르페와 저는 서로 마주 보았습니다. 항해하는 동안 조금이나마 쓸모 있기는커녕 방해만 되어 온 그가 저희와 똑같은 신앙을 지닌 인간이라니,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결코 한 인간을 이와 같은 겁쟁이와 비겁한 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 언제가 어느 목사님의 설교와, C.S 루이스의 책에서 얘기했던 그리스도인에 대한 언급 생각난다. "그리스도인이 도리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할 때가 있는데,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나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야 한다."(기억이 맞기를 바란다.) 내 생각도 그렇다. 자신과 더불어 다수가 인정하는 신앙많이 진리의 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p. 70 도모기 마을 주민들도 그랬습니다만, 이곳 농민들도 제게 자꾸만 조그마한 십자가나 메달, 성화를 갖고 있지 않느냐고 졸랐습니다. 그런 물건은 배 안에 모두 두고 왔다고 말하지 무척 슬픈 얼굴을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저는 갖고 있던 묵주를 풀어 한 알 한 알 나누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 신도들이 이러한 것을 아끼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뭔가 이상한 불안감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뭔가 실수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 왜였을까? 왜 그런 도구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까? 신앙심이 적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종교가 변질된 것일까? 변질된 것을 의미한다면, 이 내용은 복선일까?
p. 84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저희들은 나쁜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저희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모키치와 이치소우도 말없이 침묵을 지키며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습니다.
@ 나도 말문이 막힌다. 당연한 것일까? 공부좀 해봐야할 것 같다.
p. 85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 ...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 분명히 이해할 날이,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예전의 목사님 설교에서, 연단은, 하나님을 더욱 붙잡게 하기 위해 시련과 고통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p. 87 전에 출세를 위해 세례를 받은 이노우에는 일본의 가난한 농민 신도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성모를 숭배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도모기 마을에 처음 와서부터 농민들이 때로는 그리스도보다 성모 쪽을 더 숭배하고 있는 것을 알고 염려했을 정도니까요.
@ 나의 종교인, 기독교에서는 성모를 숭배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다. 내용을 보면 천주교는 그렇지 않다. 숭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 역시 변질된 신앙을 암시하는 복선인가?
p. 92 순교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순교일까?(모키치, 이치소우 : 바닷속에 나무를 심고 사람을 묶음)
p. 95 이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 위에서 저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습니다.
p. 106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바다의 단조로움이나 그 무서운 무감동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물론 만일의 이야기지만.... 그때 가슴 한구석 깊은 데서 다른 소리가 속삭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p. 107 제일 무서운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절망이라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어째서 하나님이침묵하고 계시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p. 118 그리스도는 유다조차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를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셨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길을 잘못 든 그를 그리스도는 어째서 막지 않으셨을까요? 신학생 시절부터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 하나님을 뜻을 이루기 위한 절차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p. 130 정말 이 세상은 고통과 질병뿐이에요. 천국에는 그런 것은 없다지요. 신부님? 천국이란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신부는 입을 다물었다.
@ 그럼 천국은 어떤 곳일까?
p. 141 그러면 하나님께서 악인도 만드셨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악도 하나님이 만드는 것 아닙니까? 아니, 아니, 그건 틀립니다. 신부는 얼떨결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나님은 만물을 선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이 선을 위해 인간에게도 지혜라는 것을 주셨지요. 우리가 이 지혜의 분별과는 반대되는 일을 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악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 맞는 말일까?
p. 146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 위해 있는 것이지 결코 원망을 듣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시련의 날에 악창에 걸린 욥이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p. 151 마을은 불타 버리고 그때까지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추방당했다고 했다. 배에 파도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외에는 바다도 육지도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당신은 어째서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까?'라고, 하나님이 침묵을 원망하며 신부가 연약한 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당신을 위해 만든 마을조차 불타 버리도록 당신은 방관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사람들이 추방당할 때도 당신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지 않고 이 어둠처럼 다만 침묵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왜, 어째서? 왜인지 그 이유만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는 당신이 시련을 주기 위해 악창에 걸리게 했던 욥처럼 강한 인간이 못 됩니다. 욥은 성자입니다만 신도들은 가난하고 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p. 157 "가라, 가서 너희가 이룰 일을 이루어라." 그리스도조차 자신을 배신한 유다에게 이와 같은 분노의 말을 던졌다.
@ 예수님도 사람의 몸이니 분노 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p. 170 "옳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조금 전에 나리께서는 제 고통을 위로하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만리 타국으로 거친 파도를 넘으며 긴 세월이 걸려서 이 나라에 온 것에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만약 이 올바름이 보편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어떻게 이런 고난을 견디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을 찾았겠습니까? 올바름은 어떠한 나라 어떠한 시대에도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올바른 교리가 일본에서도 올바른 것이 아니라면 그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이 신부의 생각이 나중에 이노우에의 전략에 꺾인다. 그건 페레이라 신부와의 대화에서다.
p. 171 "신부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어떤 당에서는 잘 자라는 나무도 땅이 바뀌면 마르는 일이 있다. 가톨릭교라고 부르는 나무는 이국에서는 잎도 무성하고 꽃도 피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잎이 시들어서 봉오리 하나 맺지 못한다. 흙이 다르고 물이 다르다는 것을 신부는 생각한 적이 없는가?"
@ 나중에 이 맞는것 같이 전개된다. 변질된 일본의 종교는 어떤 것일까?
p. 186 그가 혼란에 빠진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뜰 안의 정적과 매미 소리와 파리의 날개 소리였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저 애꾸눈 농민이 오로지 당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정적이, 이런 고요가 계속되는가? 이 한낮의 고요함. 매미 소리. 이런 어리석고 참혹한 일과는 전혀 관계 없다는 듯이 그분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이,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p. 187 그렇게까지 영웅이 되고 싶은가. 네가 바라고 있는 것은 남모르게 죽는 참된 순교가 아니라 허영을 위한 죽음인가. 신도들에게 칭송받고 기도받고, 그리고 저 신부는 성자였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인가.
p. 215 그때도 하나님은 바다 위에서 다만 완고하게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p. 215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건 정녕 희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p. 228 쓸데없는 고집으로 허송세월하며 옥사에서 일생을 마치느냐, 아니면 표면적으로 배교해서 인간을 위해 봉사하느냐, 둘 중 하나요. 이 점을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오. 노스님도 언제나 사와노 씨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계셨던 거요. 인자의 길이란 필시 나를 버리는 것. 나란 말이요, 쓸데없이 종파에만 사로잡힌 것을 말하오. 인간을 위해 뜻을 다하려면 부처님의 진리에나 가톨릭교의 교리에나 구애되지 않아야 할 것이오. 결국 부처님의 길도 가톨릭교의 길도 다를 바 없을 거요. 중요한 사실은 그 길을 가느냐 가지 않느냐요. 사와노 씨도 분명히 현위록에 그렇게 쓰고 계셨소"
p. 232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마카오나 고아에 있는 수도원에서 이 나라의 선교를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지. 데우스와 오오히를 혼동한 일본인은 그때부터 우리의 하나님을 그들 식으로 바꾸고, 그런 다음 다른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어. 언어의 혼란이 없어진 뒤에도 이 굴절되고 변화된 신앙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거야. 자네가 아까 말한 포교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에 가서도, 일본인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아닌 그들이 굴절시키고 변화시킨 하나님만을 믿고 있었던 거지. 우리가 하나님을 굴절시키고 변화시키고, 그리고 다른 것을... 신부는 페레이라의 말을 천천히 음미하듯 되풀이했다. '그래도 역시 우리 하나님이 아닙니까?" "다르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일본인의 마음속에서 어느 틈엔가 그 실체를 잃어가고 있었어"
p. 267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달이 울었다.
@ 정말, 밝히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인가..
p. 272 내 마음을 재판하는 것은 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주님뿐이라고 그는 입술을 세게 깨물면서 고개를 내젓는다.
@ 신부의 신앙이 맞는가. 외국의 신앙이 맞는가. 개인의 주관에 따라 신앙은 변할 수 있는 것인가..
p. 287 피로도 체념도 아닌 묘한 감정이 지금의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 '당신은 모든 굴욕을 받으셨으니 오로지 당신만이 지금의 내 마음을 알아주시면 됩니다. 비록 신도나 성직자들이 나를 선교사의 오점으로 간주 하더라도 그런 것은 이미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 이 독백이,, 뭔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p. 289 "신부는 모르겠지만 고토나 기쓰키에는 아직도 카톨릭 신도라고 하는 농민들이 많이 남아 있소. 그러나 관헌에서는 이제 체포할 생각이 없소."
"어째서입니까"
"그들은 이미 뿌리가 잘렸기 때문이야. 만약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 신부와 같은 분이 간혹 오신다면 우리도 신도들을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이 말을 하며 이노우에는 웃었ㄷ. "그러나 그럴 염려는 없어. 뿌리가 잘리면 줄기도 잎도 썩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 그 증거로서 고토나 기쓰키의 농민들이 몰래 받들고 있는 하나님은 가톨릭교의 하나님과 비슷해도 사실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있소." " 결국 신부들이 가져온 가톨릭이라는 묘목은 그 뿌리부터 썩어서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 가겠지"
@ 그들은, 신부같은 사람만 오지 않는다면 카톨릭 서민을 체포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신부없는 가톨릭은 이미 뿌리가 잘린 가톨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다. 변질된 가톨릭이란 대체 무엇일까?
p. 293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 이건 신부 혼자만의 생각인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건가, 성령님이 신부에게 그런건가..
p. 294 나는 그들을(성직자들)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 어떤 형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인지? 변질된 것은 아닌지..
p. 295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 신부 자신은 페레이라와 같지 않다는 것인가? 페레이라는 약간 돌아버렸다.. 그러나 신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왜 페레이라와 함께 가톨릭의 흔적을 찾는 일을 했던 것인가.. 이노우에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인가.
<논제>
1. '침묵'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 하나님의 침묵
2.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책 내용처럼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눈 것이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3. 일본에서는 종교의 뿌리가 잘려 종교자체가 변질 되었다는데 변질 되었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마음이나 행동을 말하는 것인가? 일본의 변질된 가톨릭이란 무엇을 말하는건가? 성모상을 더 숭배하는 것인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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