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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꽃 : 작은 시편 / 고은 / 문학동네

꽃게장세트 2017. 7. 7. 07:49

순간의 꽃 : 작은 시편 / 고은 / 문학동네




시인 고은이 누구인지 몰랐다.

수 년 전에 들어봤던 시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지 찾다가 시인 고은을 알게 되었다.

이 분의 글을 좀 더 봐야겠다.




p. 12 

소쩍새가 온몸으로 우는 동안 

별들도 온몸으로 빛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


p. 13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p. 17

두 거지가

얻은 밥 나눠먹고 있다


초승달 힘차게 빛나고 있다


p. 18

사진관 진열장

아이 못 낳는 아낙이

남의 아이 돌사진 눈웃음지며 들여다본다


p. 20

딸에게 편지 쓰는 손등에

어쩌자고 내려앉느냐

올 봄 첫손님

노랑나비야


p. 21

부들 끝에 앉은 새끼 잠자리

온 세상이 삥 둘러섰네


p. 24

바람에 날려가는

민들레씨만 하거라

늦가을 억새 씨만하거라


혼자 가서 한세상 차려보아라


p. 24

소나기 맞은 민들레

입 오무리고 견디는구나


굳세어라 금순아


p. 29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인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p. 31

지렁이 한 녀석도

산울림 들으며 자라난다

아기 무덤도

파도 소리 들으며 어른이 된다


p. 31

초신성은 멸망으로만 빛납니다

멸망으로만

새로운 별입니다

나는 누구누구였던가

아득하여라

아득하여라


p. 34

이 세상이란


여기 나비 노니는데

저기 거미집 인네


p. 38

쉼표여

마침표여

내 어설픈 45년

감사합니다


더이상 그대들을 욕되게 하지 않겠나이다


p. 39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구멍이 안 보여


p. 40

어린 토끼 주둥이 봐

개꼬리 봐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니


p. 42

정신병원은 화려하다

나는 황제다

나는 육군소장이다

나는 UN 사무총장이다

나는 가수 박훈이다

나는 신이다

나는 미스코리아다

나는 탤런트 김보길이다


정신병원은 정신병원의 별관이다


p. 43

고양이도 퇴화된 맹수이다

개도 퇴화된 맹수이다

나는 퇴화된 맹수이다


원시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리들의 오늘

잔꾀만 남아


p. 47

전과 12범 살인강도에게

세 살 때가 있었다

발가벗고 미쳐 날뛰는 연산군에게

네 살 때가 있었다

쥐암쥐암 한 살 때도 있었다


p. 50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p. 50

소년감방

날마다 손을 놀린다

팔을 놀린다

굳어지지 않아야

나가서

다시 소매치기할 수 있지


p. 51

봄바람에

이 골짝

저 골짝

난리 났네

제정신 못 차리겠네

아유 꽃년 꽃놈들!


p. 52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p. 53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p. 55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천 개의 물바울


비가 괜히 온 게 아니었다


p. 56

답답할 때가 있다

이 세상밖에 없는가

기껏해야

저 세상밖에 없는가


p. 57

60촉짜리 불빛 아래

감방의 잠든 얼굴들


다 내 배 안에 들었던 자식이었다


p. 58

한번 더 살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p. 61

설날 늙은 거지

마을 한 바퀴 돌다


태평성대 별것이던가


p. 62

내 집 밖에 온통

내 스승이다


말똥 선생님

소똥 선생님


어린아이 주근깨 선생님


p. 62

곰곰이 생각건대

매순간 나는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무덤이다


그런 것을 여기 나 있다고 삐겨댔으니


p. 63

아무래도 미워하는 힘 이상으로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사람 살 만한 아침이 있다 저녁이 있다 밤이 있다


호젓이 불 밝혀


p. 66

지난 70년 동안

수많은 천재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천재였다면

그런 행복 몰랐으리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여

아마데우스여

이하여

조선의 무명 천재들이여


p. 68

다시 한번 폭발하고 싶어라

불바다이고 싶어라


한라산 백록담


p. 70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작

속살에

싸락눈 뿌린다


서로 낯설다


p. 71

햇병아리 열두 마리 마당에 있다

어미도 함께 있다


반드시 솔개가 공중 아마득히 떠 있다


p. 72

소말리아에 가서

너희들의 자본주의를 보아라

너희들의 사회주의를 보아라

주린 아이들의 눈을 보아라


p. 72

개는 가난한 제 집에 있다

무슨 대궐

무슨 부자네 기웃거리지 않는다


p. 74

저 어마어마한 회장님 댁

거지에게는 절망이고

도둑에게는 희망이다


p. 76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씨앗


이렇게 시작해보아라


p. 76

강과 바다 오가며

가는 것들

너희들이 진짜 공부꾼이다

뱀장어야

참게야


p. 77

온종일 장마비 맞는 거미줄

너에게도 큰 시련이 있구나


p. 80

무욕만한 탐욕 없습니다

그것말고

강호 제군의

고만고만한 욕망

그것들이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진리입니다


자 건배


p. 81

자연만한 노동이

어디 있는가


오늘 나는

밭 한 뙈기 씨를 뿌렸다

자연이 싹을 틔우리라 무럭무럭 길러내리라


결국 사람이란 얌얌 얌체일밖에


p. 82

만물은 노래하고 말한다

새는 새소리로 노래하고

바위는 침묵으로 말한다

나는 무엇으로 노래하고 무엇으로 말하는가


나의 가갸거겨고교는 무슨 잠꼬대인가


p. 83

날아오는 제비들이 있는 한

나에게 살아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그 제비들

돌아가는 바다 저쪽

강남이 있는 한

내일을 기다리는 까닭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p. 85

안성읍내 5일장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병들었다가 

엊그제 일어난 사람


모르는 사람도 흐지부지 아는 사람이 된다


p. 86

나는 고향에서

고국에서

아주 멀리 떠난 사람을 존경한다


혼자서 시조가 되는 삶만이

다른 삶을 모방하지 않는다


스무 살 고주몽


p. 86

비 맞는 풀 춤추고

비 맞는 돌 잠잔다


p. 88

두메산골

장끼 놀라 후두둑 날아간다

이 녀석아

너만 놀라니?

나도 함께 놀랐다


p. 89

돌말

쇠소는커녕

흙돼지 한 머리 없는

가난뱅이에게


석가는 무슨 석가 불러들이나


p. 89

자비라는 건

정이야


정 없이

도 있다고?


그런 도 깨쳐 무슨 좀도둑질하려나


p. 94

왜?

왜?

왜?

청명한 날

다섯 살짜리의 질문이 바빴다


그런 왜? 없이는

모두 허무인 줄을

그 아이가 알고 있겠지


p. 95

재가 되어서야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 하더이다

10년 내내

제 불운은 재가 되어본 적 없음이더이다


늦가을 낙엽 한 무더기 태우며 울고 싶더이다


p. 106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에필로그>


116

2월 중순에 들어서서야, '만인보 - 1950년대 사람들'을 조금씩 써가고 있는 한편으로 어느 날 이 작은 시편 1백여 수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소나기 삼형제였다.


...


전작 시편 '남과 북'도 낯선 땅 숙소의 책상머리에서 나왔던 것이고 이번에도 마치 누가 묻어둔 것을 내가 파내는 셈이었다. 이것이 '순간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