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님의 '근대를 말하다'강연회에 참석하여 선물로 받은 책이다.
재미없게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ㅎ
그런데 재밌다. ^^
김훈님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보고 난 후 이 책을 보았을때 너무 재밌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의중을 담은 소설이라면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은
유성룡의 일기와 사실에 근거한 실제의 그를 간접적으로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다.
재밌다는 것은.... 그들은 동시대 사람이며, 임란을 같이 겪었고, 둘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 보는 중간 찌릿찌릿한 감동을 감출수가 없다. ( 나만 그럴 수도 ^^ㅋ )
칼의 노래를 읽어본 분이라면~ 이 책을 강권한다. 아니,, 이 책은 그냥 강권할 만하다.^^
page. 91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사실인가? ... 서애의 십만양별설 반대기 전국민적 상식이 된 데는 역사학자 이병도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가 조선사대관과 수정판 국사대관, 한국사대관에 거듭 이 사실을 실었기 때문이다.
page. 93 이것이 이이가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국민적 상식의 근거가 되는 기록이다. 이후 십만양병설에 과한 대부분의 기록은 이 기술을 약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
page. 109 조선 개국 200년인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침략해왔으나 조선은 전면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종 때의 삼포왜란이나 을묘왜란처럼 국지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page. 110 임진왜란에 대한 최초의 보고는 '만 명 정도의 왜구 침략 소동'이었고,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
page. 150 이일이나 신립.김명원.한응인 모두 휘하 군사 목 베는 데는 천부의 맹장이었다. 장수의 칼은 적을 베라고 있다는 평범한 사리을 모르는 용장들이기도했다.
page. 349 이때 이순신은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작성한다.
... 설령 전선 수가 적다해도 미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page. 359 결전의 날이 다가왔음을 느낀 이순신은 휘하 전 장수들을 불러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결의를 붇돋웠다.
page. 363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이순신의 말대로 힘껏 싸우자 기적 같은 대역전극이 벌어지려 했다. 그야말로 '죽으려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 상황이었다.
page. 365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면서 '전선 수가 적다해도 미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 이순신의 장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page. 374 북인이 총대를 멘 유성룡에 대한 공격은 유성룡의 전란 극복 정책에 대한 양반 사대부들의 불만을 대변한 것이다.
page. 385 유성룡이 창설한 속오군은 양반부터 노비까지 포함된 군대였고, 역시 유성룡이 실시한 작미법은 토지 소유의 과다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대동법을 뜻한다.
page. 387 유성룡이 파직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공교롭게도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치른 날이다........
후견인 유성룡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순신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도 죽을 지경의 고문까지 당한 이순신이다. 유성룡의 실각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전전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사실 노량해전은 이순신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해전이었다. 철병 명령을 받은 소서행장은 명 제독 진린에게 뇌물을 써서 안전한 철수 보장을 요청했다.
page. 390 ' 한번 죽는 것은 아까워할 것이 없소'라고 대답한 것은 이미 죽음을 결심한 이순신의 결기였다.
page. 391 이순신은 진린에게는, '한번 죽는 것은 아까워할 것이 없소'라고 말하고, 하늘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거듭 죽음에 대해 말했다. 이렇게 18일 저녁부터 시작된 싸움은 유성룡이 파직되는 19일까지 계속된다. 이순신이 최후를 맞은 것은 19일 새벽이다.
이순신은 시석을 무릅쓰고 몸소 힘껏 싸우고 있는데, 날아온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기자 이순신은, '싸움에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징비록)
...
난중잡록은 이순신이 마치 죽음을 자초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융복을 입어 적의 눈에 짤 띄는데도 이순신이 직접 북채를 들고 싸움을 독려했다는 것은 적에게 자신을 쏘아달라고 자청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선조가 유성룡을 파직시킨 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묘한 일치이자 묘한 운명이다. 이순신은 죽음으로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page. 393 이순신이 전사한 관음포 - 이순신이 선조의 시기를 피하기 위해 전사를 위장했다는 설도 있다.
page. 394 유정은 왜교성 전투에서 진린과이순신의 수군이 지원하는데도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아서 왜교성 함락을 무산시킨 용장이다. 이런 용장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의 공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선조다.
page. 398 12월 5일 유성룡은 태백산 아래 도심촌으로 가서 모친을 만났다. 만감이 교차했다. 다음 날 삭탈관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온 그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page. 400 남인 이원익뿐만 아니라 서인 우의정 이항복도 유성룡의 삭탈관작에 크게 항의했다. ....
.... 유성룡은 세상사를 잊기로 했다. 나라를 전란에서 구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page. 402 두문불출하며 사람이 오는 것을 두려워할 만큼 세상이 싫어진 것이다. 유성룡은 이제 세상을 버렸다. 아니 선조를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버리지는 않았다.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고향인 하회동으로 돌아온 그는 전란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이 나라와 백성들, 그리고 후손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회고록인 '징비록'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선조 34(1601)12월에 다시 서용의 명이 내려졌지만 나가지 않았다.
page. 406 '편안하고 조용하게 조화로 돌아가련다." 도인의 경지에 접어든 듯한 말이다.
page. 407 이듬해 2월 선조 이연도 세상을 떠났다. 저승에서 선조는 서애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이 났다.
page. 408 퇴계 선생은 '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 하여 유성룡이 장차 대성할 인물임을 예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