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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 / 휴머니스트

꽃게장세트 2014. 8. 5. 05:44

원제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 읽기

[밝은 아침을 마중하는 지혜]에서 8월에 선정한 도서다.

나는 재미있게 본 미술 관련 책이 하나도 없다. 폴 고갱의 전시회에 앞서 폴 고갱의 작품집을 보았을 때도, '내가 이 책을 왜 보고 있는걸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전시회에 가서 어느 정도 도움은 됐지만..) 때문에 이 책도 재밌을지 의문이었다. 재미까지도 아니다. '볼만하다'는 수준까지라도 나올런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볼만 했다. 작품집과 같이 이미 정해진 해석을 즐비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저자답게(?)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원제 대로 '독창적인 그림 읽기'기 아닌가 싶다.

왜 <교수대 위의 까치> 일까? 저자는 직접 보았던 영혼의 울림을 주는 두 점의 작품 중 이 책에 수록된 <교수대 위의 까치>를 제목으로 뽑았다.작품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서 의문점을 질문하고 그 질문의 대한 답을 스스로 내려서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지은이의 말> 중

부조리야말로 삶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 상태라는 것, 그것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연출하는 풍경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세상의 진리,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비밀인 모양이다.

p. 17 예술작품은, 수많은 암호문을 생성해내는 에니그마 머신에 가깝다고 해야한다. 

p. 18 그것은 늘 새로운 물음, 새로운 해석으로 작품을 살아 있게 만들어야 한다.... 독자 역시 창조적이어야 한다. 

p. 19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이라 부른다.

p. 20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한 이 느낌을 회화의 '푼크툼'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나에게 와서 꽂히는 듯한 그 촉각적 효과를 다른 이들은 못 느낄 수도 있다.

p. 21 '해석에 반대한다'는 수잔 손탁

p. 22 해석이란 작품에 관한 담론의 장에 또 하나의 이질적인 공간, 또는 시각을 애매하게 접합시키는 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표준적인 해석을 넘어서는 직관을 제공해 줄 때, 관객은 남이 찾아놓은 의미를 재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 

<주의 얼굴에 침을 밷은 자>

p. 34 영화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외려 관객의 상상력은 줄어드는 게 아닐까?

p. 38 십자가 경배를 내가 기뻐함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그 자체로서 경배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수난의 고통에 담긴 사랑과 믿음의 기억을 되살려내고, 나의 수난을 스스로 느껴보려는 열렬한 욕망이 있을 때니라. @ 교회에서 처형기구를 걸어놓은 이유.

p. 42 예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책을 삼키는 사도 요한>

p. 47 파트모스 섬 @ 요한의 묵시록을 기록했던 섬

p. 53 한 권의 책이 에스겔을 선지자로 만들었다..... 앞서간 선지자들의 책을 통해 요한은 말을 하는 능력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얻었고, 그의 예언 자체도 성경의 일부가, 즉<계시록>이 되었다.

p. 54 한 권의 책이 에스겔을 선지자로 만들었고, 한 권의 책이 요한을 예언자로 만들었다. 

p. 54 신성한 책을 먹는 것 역시 일종의 성체성사라 할 수 있다.

p. 59 '책을 먹는다'는 모티프는 매혹적이다. '먹어버리라.' 이 명령은 이제부터내가 하는 말을 남김없이 기억했다가 기록하라는 뜻일 게다.

p. 60 하지만 제 몸을 온전히 바칠 만큼 책을 신뢰해도 되는 것일까?

p. 62 성경을 통째로 삼킨 광신의 화신은 자신의 믿음과 더불어 몰락할 때도 똑같은 방식을 택한다. 

<신의 손가락>

p. 79 베사살의 궁전에 나타난 신의 손가락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신의 약속을 끝까지 믿을 수밖에 없는 한 역사적 민족의 집단적 염원이 빚어낸 강렬한 시각적 환상이었을 것이다. 

<바보의 돌>

p. 84 '바보의 돌'을 제거하여 환장의 광기를 치료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여기서 '바보'란 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 이른바 '광우'를 가리킨다. 

p. 85 광기를 치료해준답시고 환자의 두개골에서 돌을 꺼내는 트릭으로 우매한 대중의 등을 치던 사기꾼들을 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p. 86 심지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두개골 천공은(머리에 외상을 입은 경우는 물론이고) 간질 발작이나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요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p. 94 신을 향하던 사람들의 눈이 다시 인간을 향하던 시대에 광우가 문학과 예술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필연적이었다. 사람들의 다시 관심을 갖게 된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한 것은 찬란한 이성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두운 광기도 있었다. 그러니 거기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p. 95 우리 눈에는 저 무지막지한 제거술 자체가 또 하나의 광기로 보일 뿐이다. ....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외려 모욕당하고 능욕당하는 광우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은 멜랑콜리다. 

<교수대 위의 까치>

p. 112 최고의 풍자는 역시 자기풍자이다. 진정한 풍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거쳐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비웃을 때에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유머나 조크 또는 자기를 낮출때 재밌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지 않는다.

p. 112 그는 세상의 모든것을 풍자한다. 하지만 자신의 풍자가 세상을 바꾸어놓을 것이라 믿지는 않는다. 섣불리 세상을 바꿔놓으려는 노력은 외려 세상을 재앙을 몰아넣을 뿐이다. 그는 이 뒤집힌 세계를, 그것의 부조리함, 그것의 불합리함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한다. 

<누구든지 저와 같지 않다면>

p. 122 어린이를 어린이 답게 묘사한 최최의 예 ... 이 작품에서 최초로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 회화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p. 124 이 작품에서 아이는 아예 회화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 '아동의 탄생'

p. 127 카토로가 저 쪽지 위의 이미지를 열세 살의 소년 뒤러가 그린 것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예술적 효과는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p. 130 도처에서 사물을 꼭 빼닮은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 다시 시작하려면 역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화가들은 사회회를 겪지 않은 어린이, 문명화를 거치지 않은 미개인의 그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거기서 그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관행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에술의지'를 찾았던 것이다.

p. 131 아동화의 특성을 '환영주의적 재현이 없는 것, 기술을 과시하지 않는 것, 숭고하게 인상적인 형태'로 요약한다.  

p.134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라진 주체>

p. 139 이런식의 연출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서구의자화상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봐야 한다. ... 서구에서 자화상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p. 141 살짝 얼굴을 돌려 시선을 그림 밖으로 던진다.  이렇게 화가가 자신의 눈을 그림 밖으로 던지면, 그 시선을 통해 그림의 안과 밖이 서로 연결되면서 관객이 마치 그림 속의 사건에 초대 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p. 141 화가가 그림속의 사건에서 눈을 뗴고 그림 밨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자화상은 서서히 독자적 장르가 되기 시작하여, 1500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모습만 담은 자화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p. 147 '원복 없는 복제'라는 '시뮬라크르'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신중함의 알레고리> 세 얼굴을 가진 인간

p. 189 왼쪽을 보는 사내는 노년, 정면을 바라보는 사내는 장년, 오른쪽을 바라보는 사내는 청년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노년은 과거를 회상하는 세대이고, 장년은 현재를 책임지는 세대이며, 청년은 미래를 대비하는 세대이다. 따라서 격언 속의 세 시제는 동시에 세 세대를 의미하게 된다. 세 시제는 동시에 신중함에 필요한 세 가지 정신 능력을 상징힌다. 

- 세 얼굴을 가진 짐슴 -

p. 192 사자의 머리는 현재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일어나는 행동이어서 강력하고 강렬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늑대의 머리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과거에 속하는 메모리는 먹어치워져 사리지기 때문이다.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개의 머리는 미래에 벌어질 일을 가리킨다. 그것에 대한 희망은 비록 불확실하긴 하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p. 193 @ 세 얼굴을 가진 인간 -> 자신의 자화상

<해석의 바벨탑>

p. 212 이런 그림은 물론 민감한 문제를 낳을 수 있었다. 당시에느 ㄴ오직 성경이나 신화 속의 인물들만이 누드로 묘사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p. 212 신화적 제재를 가장함으로써 조르조네와 그의 후원자는 당대에는 허용디지 않았던 외설적 장면을 은밀히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p. 217 반제재 : 이는 원래 작품에 제재가 존재했는데 조르조네가 그것을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도록 애매하게 만들어놨다는 뜻이다. 

비제재 : 처음부터 작품의 제재를 아예 설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p. 219 폭풍우는 비제재의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p. 219 조르조네의 매력은 의미를 애매하게 처리함으로써 '지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있을 것이다. 

<목이 긴 성모>

p.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은 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바사리가 통탄해 마지않았던 그의 연금술 외도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 작품의 연도는 그의 죽음의 연도와 일치한다. 그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야의 개>

p. 252 검은 회화

p. 253 퀸타 델 소르도 : 귀머거리의 집

p. 261 하지만 저 그림이 만약 고야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최근에 어느 학자가 이 작품들이 고야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p. 262 '검은 회화'가 아들의 작품이라는 것은 물론 아직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주장이 옳다면..

p. 264 작가의 전기가 내뿜는 아우라는 실은 작품의 가치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고흐의 작품이 위대한 것이 어디 그가 칼로 제 귀를 잘랐기 때문이겠는가?

p. 264 작가를 이해했다고 곧 작품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p. 264 지금 프라도에 있는 것은 어차피 고야 그린 것이 아니다. 복원 전후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그 과정에서 상당한 변형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위대함이 손상되는가?.....

p. 265 작가가 누구이든, 상태가 완성이든 미완성이든, 이 작품은 개의 머리 하나만 남기고 공간을 온통 텅 비워놓은 (@원본으로 보아..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바로 그 상태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