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기술 / 알랭드 보통 / 정영목 / 청미래
처가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다. 제목은 익히 들어봤다. 베스트셀러... 아마 그럴거다. 저자의 다른책 '불안'도 읽은 바 있다. 불안을 어렵게, 재미없게 읽었기 때문에 선뜻 손이 가는 책은 아니었지만, 처가에서는 내가 시온이를 돌보게 될 일도 없고, 마땅히 할 것도 없어서 손에 쥐었다. 처가에 있는 책들의 대부분은 큰 처형이 구입한 것으로 알고 있고, 처형은 줄 긋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밑줄 그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은 워낙 인기있던(?) 있는(?) 책이라, 제목 검색만 해도 훌륭한 문장들이 줄줄이 나올 정도다. 검색 결과로 나온 블로그들을 보니 밑줄 그을 생각이 절로 사라지긴 했었다.
여행 관련 '에세이'(보통 쉽게 읽히리라 예상하는...)라지만, '불안'의 기억 때문인지 알랭드 보통의 책은 좀 어려울 것이라 예상하고, 차례에서 눈에 들어오는 제목을 골라서 본문을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은 예술편, 두 번째로는 풍경이었다. 제목을 보고 보기 시작한 건 정말 잘한 일이다.
가장 인상 깊에 나은 편은, 역시나 예술편과 풍경편이다. 예술편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는 안내자가 빈센트 반 고흐다. '영혼의 편지'를 감명깊게 읽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이 깊다. 빈센트 반 고흐는, 다른 화가들의 천편일률적 형식(배운대로..)의 그림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강조를 할 줄 아는 화가였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멋진 그림을 마음속에 그리고, 그 그림이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자연을 보러 가는 것은, 가치 있는 여행일 것이다. 여행에 대해서 부정적인 나에게 긍정의 의미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예술편, '아름다음의 소유에 대하여'에서는, 그림에는 젬병인 나에게, '데생충동'을 느끼게 했다. 제목을 보자마자 정말 궁금했다. 대체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이 있을까.. 바로, 데생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다. 데생하게 되면,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잘 관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각인된다. 즉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사람인 이상 글을 쓰면 깊게 생각할 수 밖에 없고 깊게 생각한다는 건 마음속에 보고 느낀것을 새기는 과정이 된다. 글을 쓰는 것으로도 마음속에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다.
풍경편,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에서는 '도시에서의 상처 받은 마음을 시골이나 자연에서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숭고함에 대하여'는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글은 읽는 당시에는 이해했다고 느꼈지만, 책을 덮고 나서 설명하기가 힘들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자연에서 나타나는 '경외'가 사람을 겸손하고, 안정시켜준다는 의미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이해가 부족하다는 증거다. 추후에 다시 읽어볼 필요하다. 예술편과, 풍경편을..
p.s 글을 쓰면서 보니, 마지막 귀환 편을 읽지 않았다. 급하게 책을 마치려고 한 탓이다. 양이 얼마 안되니, 이 글을 마친 후 읽어야겠다.
<귀환으로 읽고>
p. 318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 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p. 318 사막을 건너도, 빙산 위를 떠다니고, 말림을 가로질렀으면서도, 그들의 영혼 속에서 그들이 본 것의 증거를 찾으려고 할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를 입고 자신의 방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의 옆구리를 찌른다.